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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비싼 물감: 울트라마린(Ultrama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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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파란 두건을 쓰고 있는 한 소녀가 프레임 밖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관람자와 눈을 맞추는 듯 살짝 벌린 입은 오묘한 느낌을 줍니다. 우리가 아는 또 다른 그림 속의 주인공과 같이 눈썹과 속눈썹이 없어서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주인공의 큰 눈망울과 귀에 걸려 반짝이고 있는 진주 귀걸이입니다.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남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파란색이 유독 눈에 띕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65 17세기 네덜란드는 황금시대라 불릴 만큼 네덜란드 역사에서 군사, 경제, 과학, 예술 가릴 것 없이 가장 부흥했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암스테레담과 같은 도시는 무역, 금융 그리고 예술의 허브가 되었습니다. 물자가 풍족하니 생리적 욕구(Physicological needs)를 넘어 고차원의 욕구를 충족하려는 사람들로 넘치게 되었고, 때문에 당시 네덜란드의 미술 시장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림에 대한 수요가 급증합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경제 호황으로 인해 중산층이 크게 증가했고, 교회나 귀족이 예술작품을 의뢰하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네덜란드에서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주로 예술계의 후원자이자 의뢰인이었습니다.  시장에 나온 미술 작품의 가격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화가의 명성은 물론이고 물감의 색에 따라서도 가격이 달랐는데 가장 저렴한 색은 흙, 진흙에서 흔히 구할 수 있었던 안료인 갈색 물감이었습니다. 자연히 저렴한 그림은 채도가 높은 포인트 색상이 거의 없고 대신 편안한 색조의 음영이 돋보이는 스타일이 많았습니다. 이런 스타일은 그림의 조화와 깊이를 강조하며, 피사체의 형태와 구조를 더욱더 신경을 쓴 흔적을 엿볼 수 있는데요.  당시 가난한 화가들의 없는 살림에 작품에 가치를 더하기 위한 노력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화 물감 중 가장 비싼 색상은 단연코

공장에서 만들어진 예술 : 앤디 워홀(Andy Warh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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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주변은 TV, 라면, 3분 카레와 같이 대량 생산된 품목으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18세기 후반부터 약 100년 동안 지속된 산업혁명은 인간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공장의 등장과 함께 대량 생산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수치화되기 시작했고 화폐를 통해서 그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예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술과 대량 생산의 만남: 앤디 워홀 앤디 워홀 성형 전과 후 앤디 워홀(Andy Warhol)은 20세기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팝아트의 황제라고 불리는 워홀의 작품은 예술이 현대의 공장(Factory), 즉 대량 생산을 만났을 때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워홀은 20대 시절 광고 디자인과 구두 디자인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하지만 때마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부응하는 작업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 스트레스를 느끼면서 자신의 순수 예술에 대한 열망을 드러냅니다.  누구에게나 환상은 필요하다. 워홀은 순수 예술로의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을 때 이미 산업 디자인의 경력을 쌓으면서 어느 정도 상업적 마인드를 키운 후였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예술적 아이덴티티를 완성하기 위해 성형도 서슴지 않았고 마치 실적이 급한 영업사원처럼 마케팅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물감이 묻은 작업복을 입은 예술가의 전형성을 벗어던지는 대신 말쑥한 정장을 입고 새로운 예술가로서의 외적 이미지를 위해 자신의 코를 성형하고, 밝은 머리색에 맞게 밝은 톤의 화장을 하고 밤이면 밤마다 파티를 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종류의 가발을 가지고 있었는데, 상황에 따라 본인의 스타일에 변화를 주면서 인터뷰, 파티, 전시장 어디에서나 자신이 추구하는 이미지에 맞게 본인을 만들어갔습니다. 은빛 고운 머리에 검정 선글라스와 흑백의 슈트를 입은 앤디 워홀은 어디에서나 주목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이는 대중들에게 자신에 대한 호기심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사진 이전과 이후의 그림 그리고 지금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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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름다운 사진을 보면 '그림 같다'라고 감탄합니다. 반면 그림을 '사진 같다'라고 표현하면 어딘지 모르게 조금 불편해집니다. 카메라의 등장은 수많은 화가들을 거리로 내몰게 됩니다. 사진은 찰나의 순간을 정교하게 담아낼 수 있는 기기이자 매체였고 그림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목차 소개 사진 이전의 그림 사진 이후의 그림 내면의 세계에 들어간 미술 결론 사진 이전의 그림 Rembrandt van Rijn - Self-Portrait - Google Art Project 카메라가 없던 시절, 그림은 자신의 존재를 남기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예전 유럽의 귀족들은 자신의 모습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화가 앞에 앉아 꽃단장을 위해 멋진 옷을 입고 멋진 포즈를 취한 상태로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버텨야만 했습니다. 당연하게도 포즈를 취하는 모델의 컨디션에 따라 초상화의 작업 시간과 전체 일정도 달라졌습니다. 장시간 같은 자세로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화가는 하루에 두세 시간씩 나눠서 작업하거나 며칠에 걸쳐서 완성하는 식이었죠.  초상화 작업은 대부분 귀족들의 요청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화가는 그림의 의뢰자가 있는 곳으로 방문해서 그들이 원하는 장소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당시 그림의 가치는 인물과 사물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일에 달려 있었고, 이는 곧 화가의 실력과 명성으로 이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실력이 좋은 화가들은 귀족을 그리거나 궁에 들어가 왕실 화가로 활동하길 원했습니다. 그것은 더 높은 보수와 사회적 인맥 그리고 고용 안정성이 확보된 최고의 출세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진 이후의 그림 1830년대 전후 시기, 헬리오그래피 기술을 바탕으로 비밀스럽게 개발되어 오던 카메라가 세상에 태어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비트루비안 맨(비트루비아스적 인간), 인체비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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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을 상징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안 맨은 펜과 잉크로 그려진 르네상스를 대변하는 이미지 중 하나이자 과학과 예술이 어떻게 만나야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시입니다. 고대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축 10서라는 저서를 통해서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균형을 갖춘 인간의 몸을 연구해야 한다. 인체의 비례를 건축에 적용하는 원칙으로 신전 건축에도 사용해야 한다. 동시에 사람을 원과 정사각형 안에 꼭 맞게 들어가도록 그릴 수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영감을 받은 다빈치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남깁니다. 비트루비안 맨 비트루비안 맨,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카데미아 미술관   "혹자는 섬세한 선과 남자의 곱슬머리가 인간을 신성함과 연관 지어 표현했다는 평가를 합니다. 이는 다빈치 경력초기작품 '수태고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설명합니다." 수태고지, 레오나르도 다빈치. 위키피디아 인체는 비례의 모범이다 고대서부터 면적이 서로 같은 원과 정사각형을 만드는 것이 오랜 숙원이었고 이것은 π(파이)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에 당시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고대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인체의 중심이 배꼽에 있다고 믿었고 배꼽을 중심으로 원을 그릴 수 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에 영감을 받아 인체의 중심이 배꼽에 있는 동시에 원과 정사각형의 중심에 있는 그림을 남깁니다.  동시에 다빈치는 기하학적적 관점에서 머리의 길이는 8등신, 키의 1/8이며, 어깨 폭은 키의 1/4이다라며 본인의 인체 비례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간을 작은 우주로 생각했던 동시에 인체의 팔 길이와 신장 사이에 일정한 비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는 수많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품에 영감을 주게 됩니다. 그림 a. 원의 넓이 공식 네오플라토니즘과 인간 비트루비안 맨은 네오플라토니즘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네오플라토니즘(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파생된 것으로

대구미술관 회화아닌 (NOT PAIN-TINGS) 전시 정보 및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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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대구미술관 '회화-아닌' 전시를 다녀왔습니다. 현대에 살고 있지만 전혀 현대같지 않고 미래의 예술같았던 현대예술에 대해서 도슨트의 해설을 곁들이니 나도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조금은 겁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 기억에 남는 하루였습니다.  '회화 아닌' 전시개요 ⃝ 전 시 명: 2023 소장품 기획전 《회화 아닌(Not Paintings)》 ⃝ 참여작가: 김구림, 김순기, 김신일, 김해민, 데비 한, 류현민, 무진형제, 박현기, 백남준, 오민, 오정향, 왕칭송, 유                       현미, 이강소, 이수진, 임창민, 임택, 권하윤, 전소정 정연두, 정재규, 정정주, 조습 (23명)  ⃝ 전시기간: 2023. 6. 20.(화) ~ 2023. 10. 9.(월)(112일) ⃝ 장소: 대구미술관 1 전시실 (대구광역시 수성구 미술관로 40(삼덕동) ⃝ 출품작품 수: 대구미술관 소장품 중 뉴미디어 및 사진 34점  ⃝ 관람요금 성인 개인 1000원, 단체 700원 / 청소년 개인 700원, 500원 ⃝ 관람시간: 화요일~ 일요일 10시~6시 (월요일이 공휴일일 시 그 다음 평일 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