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에서 만들어진 예술 : 앤디 워홀(Andy Warhol)
오늘날 우리 주변은 TV, 라면, 3분 카레와 같이 대량 생산된 품목으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18세기 후반부터 약 100년 동안 지속된 산업혁명은 인간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공장의 등장과 함께 대량 생산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수치화되기 시작했고 화폐를 통해서 그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예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술과 대량 생산의 만남: 앤디 워홀
앤디 워홀 성형 전과 후 |
앤디 워홀(Andy Warhol)은 20세기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팝아트의 황제라고 불리는 워홀의 작품은 예술이 현대의 공장(Factory), 즉 대량 생산을 만났을 때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워홀은 20대 시절 광고 디자인과 구두 디자인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하지만 때마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부응하는 작업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 스트레스를 느끼면서 자신의 순수 예술에 대한 열망을 드러냅니다.
누구에게나 환상은 필요하다.
워홀은 순수 예술로의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을 때 이미 산업 디자인의 경력을 쌓으면서 어느 정도 상업적 마인드를 키운 후였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예술적 아이덴티티를 완성하기 위해 성형도 서슴지 않았고 마치 실적이 급한 영업사원처럼 마케팅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물감이 묻은 작업복을 입은 예술가의 전형성을 벗어던지는 대신 말쑥한 정장을 입고 새로운 예술가로서의 외적 이미지를 위해 자신의 코를 성형하고, 밝은 머리색에 맞게 밝은 톤의 화장을 하고 밤이면 밤마다 파티를 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종류의 가발을 가지고 있었는데, 상황에 따라 본인의 스타일에 변화를 주면서 인터뷰, 파티, 전시장 어디에서나 자신이 추구하는 이미지에 맞게 본인을 만들어갔습니다. 은빛 고운 머리에 검정 선글라스와 흑백의 슈트를 입은 앤디 워홀은 어디에서나 주목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이는 대중들에게 자신에 대한 호기심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사진의 가장 좋은 점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은 변할지라도.
앤디 워홀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림이라는 것은 천으로 만든 캔버스에 붓과 물감으로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고전 시대, 중세, 바로크, 로코코 시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런 고전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는 악명 높은 미국의 경제 대공황이 끝나고 물자가 풍족해지는 시기였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이든 간에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것을 지켜보던 워홀은 자신의 작품도 판화 기법을 이용해 대량생산하기로 결정합니다.
그의 작품에 활용되는 소재도 통조림 수프, 코카콜라, 달러, 대중 만화 등 대량 생산되는 품목들로 넘쳐납니다. 또한 워홀은 당대 유명인의 초상화를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하면서 더욱 유명해집니다. 마를린 먼로 같은 셀럽을 자신의 작품 소재로 활용한 것입니다. 전통적인 예술이라는 것은 대개 장인의 손으로 정성을 다해 공을 들여 완성한 것이었지만 그의 예술 작품은 공장형 대량 생산품이었습니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대신 스퀴지(Squeegee)라는 고무 롤러로 밀어서 작품을 만드는 일을 '제작'이라고 부를 만한 전부였습니다. 이렇게 과감하리만치 새로움 때문에 순수 미술계의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는 쿨하게 신경 쓰지 않고 더욱더 자신의 존재감을 이곳저곳에 과시합니다.
시간이 세상을 바꾼다고들 하지만, 사실 우리 스스로가 직접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워홀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와 상업성을 반영해 찍어내는 예술 작품에 수많은 유명인들이 러브콜을 보냈습니다. 화려하면서 자극적이기 까지 했던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었고, 신흥 부자들의 필수소장(Must-have) 리스트에 포함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그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예술
1964년 앤디 워홀은 소방서를 리모델링하여 공장처럼 작품을 생산하는 작업실을 세우고 그 이름도 노골적인 '팩토리'라고 붙였습니다. 어시스턴트를 고용해서 실크 스크린으로 작품을 대량으로 찍었는데 그 수가 많을 때는 하루에 300장이 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찍어내는 작품은 기존의 예술품들 보다 가격이 훨씬 저렴했습니다.
그의 팩토리는 그의 작업 공간이자 밤마다 파티가 열리는 파티장이었습니다. 팩토리에는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작품을 주문하고 싶어 하는 유명 인사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됩니다.
나는 깊숙하게 얄팍한 사람이다
캠벨 수프와 종이드레스 그리고 메릴린 먼로 딥티치 |
그는 이후 영화사도 차립니다. 팩토리에서 조수가 실크 스크린 노동을 하는 동안 옆에서 배우들과 함께 영화 촬영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영화 촬영 또한 그의 예술에서 중요한 영역이였습니다. 영화라는 매체도 대량 복제의 특성을 띄고 있습니다. 영화가 가진 '복제성'은 그의 예술 전반을 수식하는 단어입니다.
예술가는 사람들이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을 생산하는 사람이다.
오늘날 기업의 성공여부는 이 복제성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활용하느냐가 관건입니다. 고부가가치를 지닌 제품을 얼마나 낮은 단가에 공급하여 가격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대입니다. 앤디 워홀의 팩토리에서 생산된 작품들은 기존의 예술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가격과 생산가능 수량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유화 그림은 최소 사나흘에 걸쳐 완성되지만 실크 스크린 기법을 활용한 그의 작품은 몇시간안에 완성이 됩니다. 또한 원본은 끊임없이 복제가 가능합니다.
돈을 버는 것은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훌륭한 사업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예술이다.
앤디 워홀의 대량 복제 방식은 그의 예술 철학과 당시의 소비 문화에 대한 생각을 말해줍니다. 워홀은 20세기의 대량 생산과 소비 문화의 특징으로 말할 수 있는 캠벨 수프 통조림과 같은 상품과 미디어를 통해 배출되는 이미지와 같은 것들을 예술 작품의 소재로 차용하여 대중 문화와 예술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뭐라고 쓰든 상관하지 마라. 얼마나 길게 썼는지만 봐라
결론
앤디 워홀은 예술을 부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일반 대중들도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작품을 구매하는 주요 구매층은 당대의 유명인들이었지만, 점차적으로 대중에게까지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석판화, 실크 스크린, 프린팅 기법 등의 방식을 통해 대량의 공산품이자 예술작품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붓을 들기보단 공장을 세웠고 작업실에 매여있기보다는 스스로 거리로 나가서 마케팅에 힘을 쓴 결과 이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에 관해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고 즐길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었습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를 반복한다. 모든 것은 반복할 뿐인데 사람들이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놀랍다